제주도 올레길이 관광상품으로 대박이 나면서 지역마다 특색있는 테마길이 앞다투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제주도 올레길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한 것이 지리산 둘레길입니다. 남해에 가면 바래길이 있고 안동에 가면 과거길도 있습니다.
해인사 홍류동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소리길이 있습니다. 봉하마을에 가면 대통령길도 있고, 마산 저도에는 비치로드도 있습니다. 이밖에도 이런 저런 이름이 붙어진 길이 많이 있겠지만 합천에 선비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해인사로 유명한 합천에 해인사 말고도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마련한 블로거 팸투어에 참석을 하면서 합천 외토리에 있는 남명 조식 생가를 시작으로 삼가면소재지 3.1만세 운동 기념비에 이르는 9km 가량의 선비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겨울이면 조금 더 적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블로거들이 자신이 원하는 곳을 나누어 탐방을 하게 되었는데 단연 인기가 있었던 곳은 모산재와 영암사지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렸던 곳이 남명 조식 선비길입니다. 선비길에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이 좀 의외이긴 했는데 아마도 요즘 한창 붐이 일고 있는 길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주도 올레길도 걸어봤고, 지리산 둘레길도 걸어봤고, 바래길, 과거길, 소리길, 대통령길도 다 걸어봤지만 합천 선비길만큼 인상적인 길이 드물었습니다. 유명한 길들을 다 제치고 선비길이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는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게 될 겁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가 있고, 후학을 가르친 뇌룡정과 후대에 그를 위해서 지어진 용암서원이 있는 곳에다 선비길 걷기를 희망했던 다섯 명을 풀어놓고 차는 떠났습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인물이 아주 훤했습니다.
남명 조식의 명성에 대해서는 새삼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예와 인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그는 경과 의를 앞세우며 실천을 중시했던 선비였습니다. 벼슬을 거절하면서 초야에서 후학을 기르고 임금에게 옳은 소리를 했던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실천을 중시했던 그의 뜻은 사후에도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도 남명의 제자였습니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이곳에서 일어났는데 그 규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만세 운동의 하나라고 하니 그 기운이 과연 세기는 센 모양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남명같은 그런 올곧은 사람이 참 드문 것 같습니다. 이름을 얻으면 정치를 하고 자신을 모시고 있는 상전에게 참소리 쓴소리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드문 세상이니까요. 충성만이 살아남을 길이라며 앞 뒤도 가리지 못하고 손을 비벼대는 인간이 너무도 많은 것 같습니다.
누구나 조식처럼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 분이 몇 백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일은 없었겠지요. 그 명성 그 인품에도 불구하고 남명 조식을 찾는 인적은 드물었습니다. 꽁꽁 걸어잠근 대문은 적막감마저 느끼게 했습니다.
뇌룡정으로 들어가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용암서원과 뇌룡정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생가터를 둘러볼 때까지도 마음 속으로는 선비길에 대한 저마다의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선비길이라고해서 별시리 다른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냥 시골 아스팔트 길이 쭉 이어질 뿐이었습니다. 황토길이라도 밟아 볼 요량으로 기대에 부풀었던 분들의 불만이 터져나온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비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완전 속았다~" "차라리 다른 곳을 둘러보면 더 좋았을테데~" "이건 선비길을 찾아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기타 등등 좀 그랬습니다.
무슨 무슨 길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을 때는 당연히 그만한 볼 거리나 느낄 거리나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길들여져 있으니까요. 밋밋하고 밍밍한 아스팔트 길을 터벅터벅 걸으면서 급기야 한 분이 길 걷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마을 할머니 한 분을 붙잡고 버스 시간을 묻자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버스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하루에 두 번밖에 들어오지 않는 버스를 탓하다가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기 위해 손을 들었지만 차는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멀리 용암서원이 보입니다. 선비길에서 돌아다보며 찍은 모습입니다.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다들 선비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오늘 선비길은 완전 실패구나 싶었지만 별 뽀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실패라고 한들 어차피 걸어야 할 길이기에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길을 걸어갈수록 신기하게도 참 좋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몸도 마음도 둥실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굽은 아스팔트 길 양쪽으로 보기좋게 익어가는 황금 들판이며, 더없이 맑은 가을 하늘에 떠 있는 솜털같은 구름이며... "아~ 참 좋다" 절로 그 말이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선비길 위에서는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들을 온전히 느끼는데 아무 것도 방해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차도 거의 다니지 않았고, 눈을 현혹하는 것도 없었고, 몸을 구속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유로웠습니다. 오로지 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 걸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선비길 모습입니다. 인적도 차도 다 드물었습니다.
드디어 사람들은 그 길에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 어느새 선비길을 함께 걷는 벗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제각각 다른 삶을 살아오고 살아가고 살아 갈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낯설지만 같은 부분이 있었고, 같은 부분이 있었지만 또 다른 방향이기도 했습니다. 같아서 반가웠고 달라서 새롭기도 했습니다. 그늘 좋은 정자에 모여앉아 잘 사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선비길에 담긴 참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선비길 곳곳에다 눈요기 거리를 만들어 두고 자전거길을 만들고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거지요. 제각각 사진을 찍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것이고 만들어진 것을 누리느라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자연을 즐기고 그런 여유조차 없었을 겁니다.
선비길을 걸으면서 이런 정자를 두어 군데 만났습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나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다. 길조차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공되고 조작된 맛과 멋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담백함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선비길을 걸으면서 진정한 선비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고스란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좋고, 오해를 풀고 싶은 사람끼리도 좋고, 낯선 사람도 좋습니다. 선비길을 걸으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소통되어지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관계가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온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신비한 길입니다.
합천에 가게 되면 아무 기대없이 무장해제를 하고 선비길을 꼭 한 번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길에서 무언가를 얻으면 더없이 좋고 얻지 못한다고 해도 좋습니다. 제가 걸어본 그 어떤 길보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게 하는 아름답고도 멋진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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