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인간의 삶과 맞닿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길을 따라 꿈을 찾아 나섰고 길을 통해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무수한 만남과 이별이 길 위에는 이루어지고 그만큼의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길은 그 자체로 고스란히 삶이었습니다. 길은 인간의 한 생애이기도 하고 긴 세월을 이어온 역사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길은 시나브로 세월을 따라 변했습니다. 언제부턴가 길에서의 주인공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더불어 사람 이야기도 살아가는 이야기도 함께 사라져 갔습니다. 대신 빠름과 편함에 잠식 당한 그 자리에는 사람보다 더 대접을 받는 돈이나 자동차 같은 것들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발품을 팔아 찾아나서지 않으면 사람이 주인인 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번에 역사와 생태 탐방이라는 이름으로 경남도민일보에서는 독자들에게 그 길을 걸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몇 년 전에 다녀왔던 영남 길을 다시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과거길로도 유명한 문경새재는 영남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무상한 세월 앞에 모양도 역할도 달라졌지만, 몇 백 년 전 청운의 뜻을 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랐을 그 길에는 지금도 여전히 새소리는 청아하고 맑은 계곡물은 제 갈길을 찾아 쉼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문경새재에 이르기 전에 찾아간 곳이 유명한 토끼비리입니다. 토끼비리라는 명칭을 두고 사람들의 해석이 분분합니다. 어떤 이들은 토끼들이 다니던 길이라고도 하는데 해설사로 따라 나섰던 최헌섭씨의 설명에 의하면 동물 이름이 길 이름 앞에 붙는다해서 짐승이 다녔다는 길이라고 보는 것은 거의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조선 태조 왕건과 견훤이 싸웠던 그 시절까지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지만 토끼비리에 나오는 토끼는 산토끼 토끼가 아니라 도망가다라는 말의 사투리 '토끼다'라는 뜻이 더 많지 않을까하는 해설사의 설명이 더 그럴듯하게 여겨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개비리길을 두고 개가 다녔다 혹은 개가 다닐만큼 좁고 험한 길이라는 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개와 얽힌 스토리텔링이 많이 회자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확하게 보자면 개비리는 물가라는 뜻의 '개'와 낭떠러지의 사투리인 '비리'가 합쳐진 물가에 있는 낭떠러지 길이라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이름의 유래야 어쨌든 토끼비리 개비리 같은 길에는 제각각 모양도 무늬도 다른 우리네 선조들이 살아낸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토끼비리는 동래에서 서울로 이르는 길로 영남대로 중에서는 가장 험난했던 길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데크를 설치해서 다니기에 별 불편함이 없었지만,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리가 후덜거릴만큼 아득한 낭떠러지였습니다.
살다보면 궂은 날도 맑은 날도 있겠지만 궂은 날이라고 먹고 사는 일을 쉬지 못하듯이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도 토끼비리를 걸어야 했던 사람들은 때로는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져 목숨을 잃기도 했다고 합니다. 옛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걸었을 길을 걸으며 지금 사람들은 다만 그 험난했던 시절을 짐작할 따름입니다.
토끼비리를 빠져나와 석현성 진남문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길의 주인은 딱히 아군도 적군도 없고 남녀노소를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발자욱만큼이나 무수한 사연들이 길 위에 새겨졌겠지만 그래도 그 중에 전쟁의 기억만큼 뼈져린 게 없었을 것 같습니다.
옛길 박물관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문경새재 길이 시작됩니다. 박물관에 들어가보면 길에 얽힌 역사적인 사실을 잘 알 수가 있지만 저는 몸으로 부대끼며 느끼고 상상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에 박물관에서는 좀 건성건성 보고 나왔습니다.
길가에 세워져 있는 크고 작은 공덕비가 이 곳이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던 길임을 알게 합니다. 효자문 열녀문을 마을 입구에 세워서 그 덕행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것처럼 마을을 잘 다스렸던 벼슬아치들의 공덕비를 길이 시작되는 곳에 세워 사람들의 발길을 잠시 묶어 두게 합니다.
지금 사람들이야 그냥 돌비석 정도로 예사로이 여기지만 그 옛날 과거 길에 올랐던 선비들은 공덕비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습니다. 보면서 과거 시험에 대한 마음을 다졌을까요.
문경새재를 찾은 날은 늦더위가 여름의 끝에 매달려 몹시도 기승을 부렸습니다. 몇 걸음 옮길 때마다 등줄기에서 후줄근한 땀이 흘렀습니다. 성 앞에 드리워진 작은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잠시 이런 저런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저 그늘이 고마워 저는 솔직히 설명을 귀전으로 흘려들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일반적인 성 안의 모습인데 계단처럼 층층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설명을 굳이 하지 않아도 금방 이유를 알아차리실 겁니다. 그래야 아군이 밖의 정세를 살피고 적당하게 치고 빠지면서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었겠지요.
사람들이 신발을 벗어들고 흙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맨발로 흙길을 걷는 기분은 어떨까요? 직접 맨발로 걸으면서 그 기분을 한껏 느껴 보시라 그 말 밖에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다들 그런 기억들을 가지고 계실 겁니다. 앞서 달리는 차가 일으킨 흙먼지를 뿌옇게 뒤집어쓰면서 걸었던 시골길에 대한 추억을요. 지금은 그조차도 낭만이라고 기억을 할지 모르지만 그때는 참 죽을 맛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흙을 밟고 사는 이가 드뭅니다. 편하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다니는 길에는 낭만도 인간미도 없는 무미건조함만 가득합니다. 그런 길을 우리는 쉼없이 씽씽 달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길을 걷다 만난 돌탑입니다. 돌탑은 지금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 어디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돌탑에다 돌 하나를 더하면서 무슨 소원을 저리도 빌까 돌탑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어찌보면 욕심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간절함 같기도 한데, 수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나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이나 마음이란 게 다 그렇구나 싶습니다.
보기에는 그냥 돌탑 같은데 이것은 조산이라고 합니다. 설명에 의하면 조산은 말 그대로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을 일컫는데,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공허하거나 취약한 지점에 조산을 만듦으로써 그곳을 보강하고자 하는 의식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흔히들 알고 있는 서낭당으로 마을 입구나 경계지점에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곳이랍니다. 아래 사진은 돌로 쌓은 조산이 아니라 서낭당의 모습입니다.
"와 주막이다~" "막걸리 한 잔 걸치면 좋겠는데~" 주막 앞에 선 사람들이 너도나도 반가운 마음에 한마디씩을 거듭니다. 그러고보면 주막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이 주막에 대한 낭만과 환상을 가지고 있는 건 참 재미있습니다. 안해봐도 다 아는데 인가요^^
예전에는 이보다 훨씬 더 허름했을 것이고, 사람 냄새가 물씬물씬 났을 것이고, 팔도 사람들이 풀어놓는 사연으로 시끌벅적했을 것 같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사람살이가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 꺼리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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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길이라는 이름이 이 길을 오고갔던 사람들의 신분을 짐작케 합니다. 이 곳에 모여 앉아 가던 걸음을 잠시 쉬었을 사람들도 제각각 사연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부푼 희망에 젖어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 같고, 가족이나 주위사람들의 지나친 기대로 어깨가 무거웠을 사람도 있었을 것 같고, 낙방을 해서 낙심한 사람도 있었을 것 같고, 금의환향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어우려져 사는 곳에는 다 있을 법한 희노애락이 이곳에 뒤섞여 있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봅니다. 마침 광개토대왕 촬영팀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말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과거길이라는 이름과 그럴듯하게 어울렸습니다.
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지역과 지역을 이어주며 끝없이 계속 됩니다. 때로 가파르게 이어졌다가 밋밋하게 이어지기도 합니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던 길이 날아갈듯한 내리막길로 이어집니다.
길을 걸으면서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보는 즐거움에 빠졌습니다. 혼자 생각 삼매경에 젖어 정해진 시간 안에 걸었던 길은 여기까지 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두고 시작과 끝을 이야기 하는 것은 우습겠지만 걷지 못한 나머지 길은 또 언제가 다시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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