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무릉산에는 장춘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무릉산 장춘사' 이름만으로는 중국 어디에 있는 엄청난 절간 같지만 이름에서 풍기는 것과는 달리 작고 소박합니다. 장춘사 가는 길은 걸어야 제 맛입니다. 좁다란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조촐하게 서 있는 장춘사와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 장춘사를 찾았던 게 언제였던가! 기억도 어슴프레합니다. 그 때는 절간들이 지금보다는 덜 화려했고 덜 복잡했고, 욕심이 덜 묻었던 시절이라 장춘사라서 특별히 조용하고 고즈늑하다 그리 느낀 것 같지는 읺습니다.
그런데도 기억에 남아있는 장춘사는 그냥 좋았습니다. 이유없이 그냥 좋은 게 가장 좋아 거라 하지요. 좋아하는데는 이유가 없어야 한다데요. 아무튼 그냥 좋은 장춘사를 그 후로 드문드문 찾았습니다.
처음 장춘사를 찾았던 그 때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생각해보면 다만 세월이 지난 게 아니라 장춘사에 동행했던 사람들도 흘러간 세월과 함께 지나가버렸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 남남처럼 등을 돌린 사람. 가끔 안부를 묻는 정도의 사람.
장춘사에는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일주문입니다. 사람들은 시골집 사립문 같이 생긴 이 문 앞에서 낯설지만 정겨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세상 어느 절에서도 볼 수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이 문을 두고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어쩌면 불이문일 수도 있겠네요. 그 문을 지나면 경계도 구분도 없는 몰아일체의 경지에 이른다는... 일주문이면 어떻고 불이문이면 어떻습니까 보고싶은대로 보면 그만이지요. 딱히 문에다 뭐라 간판을 내걸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그런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이 문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춘사를 통째로 좋아했지만 그 중에서 장춘사하면 언제나 대나무로 성글게 만든 이 문이 떠오른다던 그 사람은 이제 문 사이로 설렁설렁 드나드는 바람처럼 자유로워졌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지런히 변하고, 떠나고, 잊혀지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모양입니다.
일주문 바로 옆에는 금강문이 있습니다. 벽에 그림으로 딱 붙어 서 있는 사람이 네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인 것으로 봐서는 천왕문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일주문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그 옆에 있는 금강문에는 관심이 덜 합니다. 비스듬히 열린 쪽문과 대나무문의 조합이 환상적입니다.
사람들은 반쯤 열린 금강문 안으로 쓱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다시 돌아보지 않습니다. 슬그머니 돌아봤더니 금강문 빗장에 두 마리의 거북이 매달려 있습니다. 저들에게도 제 몫의 임무가 주어졌을테지요.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걸어오면서 보지 못한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세상에는 자세히 봐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아름다운 것들도 많습니다. 뒤돌아보면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문득 뒤돌아보면 부질없이 매달린 것, 기억해야 할 것, 잊어야 할 것, 놓아야 할 것, 잊고 살았던 것, 그런 것들이 보입니다. 장춘사 금강문에 매달린 두 마리 거북이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대웅전 앞마당이 답답해보입니다. 예전에는 한없이 넓어보이던 마당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남긴 욕심의 흔적들로 가득합니다. 한 쪽 언덕배기를 바라보며 절로 새어나오는 말~ "드디어 장춘사도 불사를 하는군, 장춘사도 이제 변했어~~"
마지막 한 가지까지 다 비워냄으로서 비로소 성불에 이른 부처님은 가진 것을 비워내는데 평생을 받쳤습니다. 그런 부처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딱 한가지입니다 "다 부질없고 부질없는 짓이야"
우리는 지금 그런 부처님 앞에 엎드려 무엇을 그토록 간절히 바랄까요. 다들 많이 가지고 싶다고 더 가지고 싶다고 아우성입니다. 어쩌란 말인가요. 기복 신앙으로 변질된 대한민국 절간에는 부처님는 사라지고 저속한 욕망만 가득합니다.
변하고 또 변하는 게 세상이지만 여전히 장춘사를 지키고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 햇살아래 장독대 곁을 지키는 담쟁이넝쿨, 마당 한 켠에서 마르지 않고 흐르는 샘물, 일일이 돌아보며 인사를 건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고맙고 반갑다고.
장춘사 뒤뜰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산신각, 독성각입니다. 그 앞에 서면 문득 고졸미가 느껴집니다. 간결하고 단순해서 오히려 기품이 서려있는... 세상 인심이 바뀌어서 절간이 더 이상 위안의 장소가 되어주지 못해도 미련처럼 놓지 못하고 발길을 옮기는 것은 이렇게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직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장춘사의 뒷모습은 여전히 단아합니다. 오래 전 장춘사에 잠시 머물렀다는 작가 황석영도 무심하게 혹은 온갖 상념에 젖어 이 자리에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렁설렁 써 내려간듯한 '해질무렵'이라는 최근 작품을 읽으며 여전한 내공을 느꼈던 기억도 장춘사와 함께 떠오릅니다. 그는 지금쯤 이 곳을 까맣게 잊었을까요!
이 자리에 서서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와는 이제 대면대면 멀어졌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변심을 아쉬워하고 서운해합니다. 그 친구도 나처럼 이 곳에 서서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투덜거리다 돌아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고요하고 맑은 그래서 존재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절간은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것 같습니다. 장춘사를 찾아와 이 곳에 어려있는 추억, 얻었던 위안, 누렸던 즐거움들을 오랜만에 다시 더듬어 봅니다. 이만큼이어도 고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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