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하다 보면 가끔 좋은 일도 있습니다. 지난 5월 19일, 부산에 계시는 거다란님의 초대로 연극을 한 편 보게 되었습니다. 연극 본 소감을 블로그에 올려주는 대신에 거금 2만원씩이나 하는 입장료를 주지 않고 공짜로 봤거든요.
그런데 그만 이런저런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지금까지 감상글을 쓰지 못한 채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거다란님을 볼 때마다 무슨 외상값 떼먹은 것처럼 찔렸는데 오늘에사 드디어 갚게 되어서 무척 홀가분한 마음입니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게 좀 있습니다. 지역 문화에 대한 자존감이랄까 자부심 같은 게 부족합니다. 지역에서 하는 게 뭐 그리 좋을까봐서~ 혹은 지역에서 만든 게 다 그렇지 뭐~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는 지역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 국가 정책도 크게 한 몫을 할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에 있는 극단 새벽에 연극을 보러가면서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창원과 부산은 거리로 보면 같은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서울과 부산만큼은 아니더라도 부산과 창원의 문화적 분위기는 신기하게도 도시의 규모만큼 차이가 난다는 걸 확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극 제목이 "니르바나로 가는 길"입니다. 우선 제목이 몹시 난해했습니다. 더구나 포스터에 붙어 있는 배우들이 요즘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칙칙하고 우중충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기발랄하고 흥미진진한 연극은 아니겠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원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더라구요. 소문이 나지 않은 잔치에 내놓은 음식 맛이 너무 좋아서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었습니다.
연극을 본 소감은 한마디로 그야말로 원더풀이었습니다. 무겁고 어두운 소재를 1시간 10분 동안 그렇게 집중력 있게 풀어낼 수 있는 연출가의 탁월한 실력에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 명의 출연 배우들이 연극을 마치고 무대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
연극에는 단 세 명이 출연합니다.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 하는 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내용에 몰입할 수 없는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탄탄한 구성으로 마치 회오리 속으로 빠져들듯이 스르르 이야기 중심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음을 어느 순간 느끼게 됩니다.
연극에는 두 할머니가 등장합니다. 한 분은 이미 죽은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고, 살아 있는 다른 한 분의 할머니가 사회복지사에게 자신의 삶을 고해성사하듯 툭툭 던지는 이야기를 통해 실마리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줄거리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러나 간단한 이야기 속에 담아낸 연출가의 의도는 심오했습니다. 사회라는 틀 안에서 '나'와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파괴되는지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배타성과 폭력성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습니다.
미자 할머니와 옥이 할머니는 종군위안부였습니다. 서로 의지하며 살았던 두 할머니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죽음을 두고 자살이라고 생각하는 마을 이장과 타살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복지사와의 갈등 이면에는 개인의 아픔을 넘어 역사의 아픔이 숨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부터 상처받은 사람들이 숨어들어와 마을을 이룬 섬 지문도, 그런 특성이 있는 지문도 사람들은 뭍에 사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우호적이면서 배타적입니다.
지문도 사람들은 미자 할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할머니들을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옥이 할머니는 사람들의 배척이 자신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지게 됩니다.
미자 할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지문도 사람들은 미자 할머니를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넣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을 핍박했던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자 할머니를 지문도 사람들은 '우리'에서 제외해 버립니다.
'우리'에서 '나'로 고립되는 이유는 이렇듯 지극히 이기적이고 모순적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에서 '우리'가 되는 과정도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같은 학교를 다녔다, 같은 지역에 살았다, 같은 일을 한다, 그런저런 이유로 '나'는 '우리'로 집단화되기도 합니다.
미자 할머니는 일본인이었지만 조국 일본으로부터도 소외받고 버림받은 일본인 종군위안부였습니다. 일본인에게 상처받았다는 공통점으로 본다면 지문도 사람들과 미자 할머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의식 속에는 늘 일본인은 가해자이고 우리는 피해자라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고통에만 천착을 하게 되면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또다른 가해를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임을 모르는 것이지요.
연극이 끝나고 배우와 감독, 블로거 몇몇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
니르바나로 가는 길에 대한 연출의 변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연극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지 잘 드러나 있기도 했구요. 지금 우리는 혹은 나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한 번쯤 돌아보고 새겨볼만한 글이라 옮겨 적어 봅니다.
속시키고, 수도권은 비수도권 지역을 지방화 변방화 시킨다. 표준말을 사투리로 업신
여기고, 특목고는 일반고를 우습게 여기고, 젊음들은 늙음을 무시하고. 사장들은 노동
자를 그저 부리는 대상으로 보며 제 것을 나눠주는 천한 것들이라 생각한다. 민족애는
인류애로 확장되지 못하고, 인류애는 생명사랑으로 심화되지 못하고 있다. 연극 니르
바나로 가는 길'은 우리가 분리하거나 차단하고 있을 지 모를 '그'에 대한 극단 새벽의
성찰이다.
"'나'는 누구나 외로운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라는 울타리 속에 들어가기 위해 기를 쓴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도 이해받지 못할 때 결국 '우리'는 '나'가 되고 '나' 라는 존재는 더 많은 외로움과 싸울 수밖에 없다." 연극 속에는 그런 대사가 나옵니다.
가볍고 유쾌한 것을 추구하는 시대에 걸맞지 않게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그래서 더 빛나는 연극이 '니르바나로 가는 길'입니다. 연출가의 인간과 삶을 해석하는 탁월한 혜안과 그것을 표현해내는 뛰어난 연출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서도 '나' 는 또다시 섬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나'는 지금 '우리' 속에서 외롭지 않으신지요? 연극은 부산 극단 새벽에서 7월 말까지 계속됩니다. 연극을 보신 후 그 물음에 답을 해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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