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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야기

운동판에서 서울대학 간판이 그리 중요하나?

by 달그리메 2012. 1. 31.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나면서 곳곳에 서울대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있습니다. 서울대 합격이 개인의 영광을 떠나 사회에 이바지하는 바가 얼마나 큰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울대 합격 현수막은 학벌 중심 사회인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열심히 노력한 학생들에게 축하는 못해줄 망정 딴지를 거느냐고 하실 분이 꼭 있을 겁니다, 제가 많이 부족해서 서울대학 갈 능력이 없기도 했지만, 살면서 서울대학 간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서울대학 가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입장에서 보면 서울대 입학이 무슨 대단한 벼슬도 아니고 내걸린 현수막이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국적은 바꿀 수 있지만 학적은 바꿀 수 없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을만큼 대한민국이 뿌리깊은 학벌 중심 사회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서울대 간판 하나만으로도 사회 안에서 평생 대접받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회가 결코 건강하고 바람직하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블로거와 트워터 하시는 분들이 편하게 자리를 같이했습니다.

얼마 전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창원 갑에 출마를 한 문성현 통합진보당 후보와 블로거들이 편하게 술자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총선에 맞추어 펴낸 <밥먹여 주는 진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문성현 후보는 노동 운동을 하기 위해 서울대 출신이라는 학력을 밝히지 않고 취업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대학 진학률이 세계 1위를 자랑할 만큼 대졸 출신이 많은지라 특별할 것도 없는 학력이지만 70~80년대만 해도 노조가 만들어지기 이전이거나 태동되는 시기였으므로 기업주들은 대졸 출신 사원들의 기능직 입사를 지극히 꺼렸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서울대뿐만이 아니라 4년제 대학 출신자들은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노동 운동을 하기 위해서 서울대 출신을 밝히지 않고 취업을 했다는 대목에서 제가 문성현 후보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서울대 졸업장이 노동 운동을 하는 동안 득이 되었는지 아니면 독이 되었는지요?" 그랬더니 득이 될 때도 있었고 독이 될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보탬도 뺌도 없이 사실이고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악한 노동 환경을 바꾸고 노동자들이 정당하게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면 대학 졸업장 그것도 서울대 졸업장은 엄청 장애가 되었을 겁니다. 

반면에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도 서울대 졸업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거나 알아서 대접을 했을 거라는 짐작이 됩니다. 서울대 출신이라면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길이 있었을 텐데 노동 운동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뭇사람들로부터 충분히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테니까요. 어쩌면 함께 운동을 하던 동료들에게조차 그런 대접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자의든 타의든 독이 될 때도 있었고 득이 될 때도 있었다는 서울대 졸업장에 대해서 정작 문성현 후보 자신은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조차 사회가 그렇게 만든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듣는 입장에서는 좀 껄끄러웠습니다.

문성현 후보는 서울대 출신 운동가로서 단 한 차례도 국회의원을 하지 못한 것은 자신 혼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심상정 이정희 같은 서울대 운동권 출신들은 나름 정치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대 출신 운동가라고 해서 정치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서울대 출신 운동가들은 다 국회의원을 해야 한다는 법칙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런 말투 속에서 서울대 출신에 대한 우월감 혹은 서울대 출신으로서 누려야 할 당위 같은 것이 느껴졌다면 지나친 비약이었을까요.

서울대 출신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에 이해찬 전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이해찬이 문성현 후보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서울대 나와서 국회의원도 해먹고 장관도 해먹고 국무총리도 해먹었는데 서울대 나와서 국회의원도 한 번 못해보고 뭐하느냐구요. 저는 이 장면에서 완전 쩝쩝~하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날 지경이었습니다.

책 사인을 하고 있는 문성현 후보

뿌리깊은 학벌중심 사회인 대한민국에서는 문성현이나 이해찬의 그런 발상이 특별히 더 나쁘다 그리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 인심이 사회 분위기가 무의식으로라도 그들의 사고를 그렇게 만들었테니까요. 그럼에도 그들의 그런 서울대 간판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을 한 번 바꿔보고 싶다고 운동판에 뛰어든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들을 넘어서는 가치관이 있을 거라는 기대 같은 게 일반 사람들에게는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고민하고 바꾸기 위해서 애쓰고 움직이는 게 운동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지요.

문성현 후보의 진정성을 그런 식으로 폄하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지만 노동 운동을 해온 존경스러운 이력을 가진 그 역시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문성현 후보의 개인을 넘어서 운동가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이번 선거와 시기를 맞추어 펴낸 <밥먹여 주는 진보>라는 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보태졌습니다. 마음먹고 앉아서 읽다 보니 30분이면 족히 완독을 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비정규직을 줄이고 일자리를 늘여 밥을 먹여주겠다는 진보 진영의 입장을 아주 급조한 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대필을 하지만 자신은 직접 썼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지만 서울대 출신이 썼다고 하기에는 솔직히 허접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나무에게 미안하고, 명분과 간판으로 만들어진 이런 책자들로 인해 사장되고 있는 훌륭한 책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습니다.

서울대 출신이 진정 자랑스러울 수 있으려면 서울대 간판을 내세워 누리려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능력과 실력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진중공업 김진숙처럼 평생 노동판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노동자들에 끼친 영향은 서울대 졸업장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기득권 세력들이 스스로 권위를 내려놓으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절반은 저절로 해결되거나,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기가 훨씬 수월한 세상으로 바뀌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서 그런 꿈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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