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늙지도 젊지도 않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늙어갈 것이다. 물리적으로 나이들어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섭리고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최근 나이들어가는 것에 약간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인간은 연륜이 깊어지고 그래서 지혜로워진다고 우리는 도덕시간에 배운 듯하다. 하지만 근래 만난 나이든 사람들을 보면서 적어도 객관적이거나 지혜롭거나 합리적이거나 하는 것과 나이 들어가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무수히 확인을 하게 된다.
얼마 전 60대 초반부터 80이 넘은 어르신들과 나들이를 갈 기회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는 6시간 남짓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을 견뎌야 했다. 차 안에서 오고가는 대화들 때문이다. 대화의 대용은 주로 정치적인 것들아었다.
"나라꼴이 엉망이다 다같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야 한다" 이 정도는 기본이다, "대통령 주변에는 간첩들이 득실거린다." "청와대는 빨갱이들한테 점령당했다." "젊은 사람들을 간첩들이 전부 세뇌시켰다." "나는 한 번도 여론 조사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다. 나이든 사람들은 싹 빼고 젊은 사람들만 여론조사를 해서 지지도를 속인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아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틀어놓은 텔레비젼에 미투 관련 이야기가 나오자 뒷자리에 있던 점잖고 교양있어 보이는 할머니가 큰소리로 떠들었다 "이제 좀 그만해라. 여자들이 다 꼬리를 치니까 건드리지 가만 있는데 남자들이 그러냐!!" 만약 할머니 딸이 당해도 꼭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그런 이야기 조차 의미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꾹 눌러 참았다.
그날은 구질구질하게 비가 내렸는데 나는 가지고 간 봉하마을에서 산 노무현 대통령이 그려진 우산을 주눅이 든 채 조심스럽게 써야 했다. 같이 간 일행 한 명은 그 우산을 결국 쓰지도 못했다. 우리는 마치 그 집단에 파견된 간첩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다음에 만난 어떤 할머니의 이야기다. 이명박 구속영장 청구를 보면서 하는 말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어딨냐 문재인도 재산 억수로 숨겨놨다 카더라. 정권 바뀌면 문재인이도 감옥갈 낀데 왜 저럴까?" "숨겨놓은 거 봤어요?" 물었더니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한다. 고백하자면 이런 이야기를 한 할머니는 우리 엄마다.
다음은 카페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4명의 할머니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는데 대화가 또 그놈의 정치 이야기다. 거품을 물고 열변을 토하는 내용이 이번에는 개헌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을 8년 더 해먹을라고 밀어부친단다. 나라꼴이 엉망진창이라고 한다.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강력한 통치가 필요하단다.
그러면서 우리쪽을 힐끔힐끔거리며 덧붙이는 한 마디. 우리는 이제 살만큼 살아 그만이지만 젊은 자식들 살아갈 날을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이라며 진저리를 친다. 마치 지금 우리가 공산 치하에서 모진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기라도 하듯이. 노인들이 문제인을 싫어하는데 마땅한 까닭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냥 고집불통이라고 할 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 같다.
점점 노년 인구는 늘어가고 젊은이들이 줄어든다. 인구 구성비의 불균형은 세대간 갈등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노인들에 대한 젊은이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기사를 얼마 전 읽은 기억이 난다. 어쩌면 지금의 이런 노인들의 모습을 젊은이들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제 조금씩 늙은이가 되어가고 있다. 내가 두려운 건 나이 들면서 생각이 보수적으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아니다. 적어도 옳고 그름을 제대로 구분하는 판단력조차 없는 노인네가 될까 하는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이들어가야 할지를 요즘 노인들을 통해 아주 생생하게 배우고 있다. 단, 모든 노인들이 그러하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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