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이야기

곽재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떠올리다

by 달그리메 2023. 3. 25.

의령은 인구가 3만이 채 안 되는 작은 곳이다.  그런데 의령은 그냥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 아주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것으로 유명하다. 호암 이병철, 벽산 안희제, 망우당 곽재우는 의령이 배출한 3대 인물인데 경남이 배출한 인물이라고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면면이 아주 짱짱하다.

 

그 중에서도 오늘 가장 중심에 놓고 이야기 할 인물은 망우당 곽재우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장군으로 홍의 장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태어난 곳이 의령이고 마지막 죽은 곳도 의령이다. 마지막 여생을 보낸 망우정이 지금은 창녕으로 되어있지만 창녕이나 의령의 경계가 그 당시에는 지금과는 좀 달랐다고 하니 의령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 망우당 곽재우는 선조로부터 2등 공신으로 책봉를 받았다. 일등 공신 안에 원균이 들어있는데  이를 두고 원균은 과대평가 되고 곽재우 장군은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균의 평가에 대해서 잘못 알려진 바가 있긴해도 곽재우가 원균보다 못한 책봉을 받았다는 것은 좀 의외이긴 하다. 어쨌던 속좁은 선조의 속내를 알 수 없기는 하지만 당시 이순신이나 원균은 이미 죽고 없었지만 살아있는 곽재우를 두고 경계의 대상으로 여긴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의령에 들어서면 정암진 입구에 붉은 색 옷을 입고 위용을 떨치며 서 있는 동상이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홍의 장군 곽재우다. 곽재우 장군의 동상이 정암진에 서 있는 것은 의령을 상징하는 인물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까닭이 있다. 정암진은 곽재우 장군이 두번째 승리를 거둔 의미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정암진 나루를 건너는 철교

곽재우는 소위 말해서 아주 잘나가는 가문의 자제였다. 선대가 평양감사 어디 목사 까지 지냈는데 지금으로 보자면 도지사급에 견줄 수 있는 그런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의병 활동은 일반 평민들이 나서서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조직을 모으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바탕을 만드는 핵심은 모두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었다.  

 

가장 근래에 있었던 촛불집회를 봐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물론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가장 큰 힘이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집회를 가능하도록 준비를 하고 마당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인권이나 가치있는 삶에 대한 이해와 그런 것들을 위해 사회와 국가의 역할이나 기능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아는 것은 배움을 통해서 얻게 된다. 하루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들은 배움의 기회가 적을 뿐더러 실행에 나서기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누구나 정의롭고 배움을 행동으로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곽재우 장군은 특별한 인물이었다. 곽재우는 열 여섯에 남명 조식 선생의 외손녀와 결혼을 했다. 이는 훗날 임진왜란 때 분연히 일어나 최초로 의병을 조직하게 되는 것과 연결고리가 있다.  의를 중심에 두고 실천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던 남명 조식을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남명 조식은 율곡 이이,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유학자로 꼽힌다. 곽재우 집안은 어른들 끼리 이리저리 촌수가 얽혀 퇴계 이황과는 친인척의 관계였고 이황과 친분이 있었던 남명 조식과도 연결이 되어 곽재우는  그 밑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좋은 환경에서 보고 배운 바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명조식과 제자 곽재우 사이에 얽힌 일화가 재미있다. 15살 곽재우가 조식 선생 밑에서 공부를 하던 어느날, 조식 선생이 제자들에게 소태국을 끓여서 돌렸다고 한다. 소태는 소의 쓸개처럼 쓰다고 해서 붙여진 나무 이름이다. 국을 마신 사람들이 토하고 뱉어내는데 곽재우는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묵묵히 마셨다.

 

이를 지켜본 남명 조식이 "어째 너는 소태국이 쓰지 않느냐 " 했더니 어린 곽재우의 답이" 원래 쓴 것이 몸에 약이 된다고 했습니다. 몸에 들어가면 다 약이되는 것을 입에 쓰다고 버릴 까닭이 무엇이겠사옵니까"  제자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어린 곽재우의 충정이었는지 타고난 성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스승에 그 제자가 아닌가 싶다. 

곽재우가 북을 매달아 의병을 모았다고 전하는 헌고수는 60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단풍이 곱다

가진자의 사회 환원이라는 뜻인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이제 낯설지 않은 단어가 되었다. 많이 가진 사람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내가 노력해서 번 돈인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은 사회와 국가를 바탕으로 그 속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획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400년 전에 이미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사람이 곽재우다. 곽재우는  "비록 벼슬을 해서 녹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재산은 나라를 위해 쓰는 것이 마땅하다"며 의병활동에 전 재산을 내 놓았다. 뿐만아니라  외가든 본가든 끌어올 수 모든  것을 동원 했고 가족뿐만 아니라 일가가 난리통에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곽재우는 전쟁이 끝난 후 벼슬을 마다하고 벽곡찬송을 하며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창녕에는 그가 마지막을 보냈던  망우정이 있다. 망우는 우환을 잊는다는 뜻이다. 전쟁 중에는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모든 것을 내려 놓았던 그가 마지막까지 잊고 싶었던 걱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곽재우는 역사 속에 박제된 영웅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살아있는 전설이 아닐까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