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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장춘사, 그래도 고맙다

by 달그리메 2023. 4. 1.

함안 무릉산에는 장춘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무릉산 장춘사' 이름만으로는 중국 어디에 있는 엄청난 절간 같지만 이름에서 풍기는 것과는 달리 작고 소박합니다. 장춘사 가는 길은 걸어야 제 맛입니다. 좁다란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조촐하게 서 있는 장춘사와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 장춘사를 찾았던 게 언제였던가! 기억도 어슴프레합니다. 그 때는 절간들이 지금보다는 덜 화려했고 덜 복잡했고, 욕심이 덜 묻었던 시절이라 장춘사라서 특별히 조용하고 고즈늑하다 그리 느낀 것 같지는 읺습니다.

 

그런데도 기억에 남아있는 장춘사는 그냥 좋았습니다. 이유없이 그냥 좋은 게 가장 좋아 거라 하지요. 좋아하는데는 이유가 없어야 한다데요. 아무튼 그냥 좋은 장춘사를 그 후로 드문드문 찾았습니다.

 

처음 장춘사를 찾았던 그 때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생각해보면 다만 세월이 지난 게 아니라 장춘사에 동행했던 사람들도 흘러간 세월과 함께 지나가버렸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 남남처럼 등을 돌린 사람. 가끔 안부를 묻는 정도의 사람.

 장춘사에는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일주문입니다. 사람들은 시골집 사립문 같이 생긴 이 문 앞에서 낯설지만 정겨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세상 어느 절에서도 볼 수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이 문을 두고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어쩌면 불이문일 수도 있겠네요. 그 문을 지나면 경계도 구분도 없는 몰아일체의 경지에 이른다는... 일주문이면 어떻고 불이문이면 어떻습니까 보고싶은대로 보면 그만이지요. 딱히 문에다 뭐라 간판을 내걸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그런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이 문을 볼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춘사를 통째로 좋아했지만 그 중에서 장춘사하면 언제나 대나무로 성글게 만든 이 문이 떠오른다던 그 사람은 이제 문 사이로 설렁설렁 드나드는 바람처럼 자유로워졌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지런히 변하고, 떠나고, 잊혀지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모양입니다. 

일주문 바로 옆에는 금강문이 있습니다. 벽에 그림으로 딱 붙어 서 있는 사람이 네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인 것으로 봐서는 천왕문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일주문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그 옆에 있는 금강문에는 관심이 덜 합니다. 비스듬히 열린 쪽문과 대나무문의 조합이 환상적입니다.

 

사람들은 반쯤 열린 금강문 안으로 쓱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다시 돌아보지 않습니다. 슬그머니 돌아봤더니 금강문 빗장에 두 마리의 거북이 매달려 있습니다. 저들에게도 제 몫의 임무가 주어졌을테지요.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걸어오면서 보지 못한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세상에는 자세히 봐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아름다운 것들도 많습니다. 뒤돌아보면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문득 뒤돌아보면 부질없이 매달린 것, 기억해야 할 것, 잊어야 할 것, 놓아야 할 것, 잊고 살았던 것, 그런 것들이 보입니다. 장춘사 금강문에 매달린 두 마리 거북이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대웅전 앞마당이 답답해보입니다. 예전에는 한없이 넓어보이던 마당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남긴 욕심의 흔적들로 가득합니다. 한 쪽 언덕배기를 바라보며 절로 새어나오는 말~ "드디어 장춘사도 불사를 하는군, 장춘사도 이제 변했어~~" 

 

마지막 한 가지까지 다 비워냄으로서 비로소 성불에 이른 부처님은 가진 것을 비워내는데 평생을 받쳤습니다. 그런 부처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딱 한가지입니다 "다 부질없고 부질없는 짓이야"

 

우리는 지금 그런 부처님 앞에 엎드려 무엇을 그토록 간절히 바랄까요. 다들 많이 가지고 싶다고 더 가지고 싶다고 아우성입니다. 어쩌란 말인가요. 기복 신앙으로 변질된 대한민국 절간에는 부처님는 사라지고 저속한 욕망만 가득합니다.

변하고 또 변하는 게 세상이지만 여전히 장춘사를 지키고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 햇살아래 장독대 곁을 지키는 담쟁이넝쿨, 마당 한 켠에서 마르지 않고 흐르는 샘물, 일일이 돌아보며 인사를 건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고맙고 반갑다고.

장춘사 뒤뜰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산신각, 독성각입니다. 그 앞에 서면 문득 고졸미가 느껴집니다. 간결하고 단순해서 오히려 기품이 서려있는... 세상 인심이 바뀌어서 절간이 더 이상 위안의 장소가 되어주지 못해도 미련처럼 놓지 못하고 발길을 옮기는 것은  이렇게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직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장춘사의 뒷모습은 여전히 단아합니다. 오래 전 장춘사에 잠시 머물렀다는 작가 황석영도 무심하게 혹은 온갖 상념에 젖어 이 자리에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렁설렁 써 내려간듯한 '해질무렵'이라는 최근 작품을 읽으며 여전한 내공을 느꼈던 기억도 장춘사와 함께 떠오릅니다. 그는 지금쯤 이 곳을 까맣게 잊었을까요!

 

이 자리에 서서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와는 이제 대면대면 멀어졌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변심을 아쉬워하고 서운해합니다. 그 친구도 나처럼 이 곳에 서서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투덜거리다 돌아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고요하고 맑은 그래서 존재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절간은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것 같습니다. 장춘사를 찾아와 이 곳에 어려있는 추억, 얻었던 위안, 누렸던 즐거움들을 오랜만에 다시 더듬어 봅니다. 이만큼이어도 고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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