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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명절 증후군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by 달그리메 2010. 9. 22.

추석날 아침 늦게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고 일어나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로운 추석을 맞아보기는 22년 만인 것 같습니다. 감개무량입니다. 손을 꼽아 헤아려보니 세월이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며느리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러하겠지만 저 역시 명절이나 제사에 얽힌 사연이 참으로 많습니다.

시어머니는 제사를 거의 종교처럼 떠받들었던 분이었습니다. 집안이 흥하고 망하냐는 조상을 잘 모시느냐 마느냐로 결정이 된다고 믿고 계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시어머니의 제사에 대한 열정은 거의 광신도 수준이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제사나 명절이 가까워오면 달포 전 쯤부터 인근에 있는 삼천포 시장을 새벽마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게 왜 그러시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 까닭이 있었습니다.

생선을 살 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첫물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야 부정이 타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질 또한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절대 나이롱이나 월남 고기는 사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참'자가 들어가는 생선만 간택이 되었습니다. 값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사는 무조건 정성이라고 했습니다.

 
 

 시어머님이 사들인 제사용 음식들은 고방이라고 불리우는 창고에 저장이 되었습니다 
                                    생선은 그물망에서 말리어졌구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결혼을 하고 십 몇년 동안을 그야말로 많은 것을 자력으로 해결을 해야 했습니다. 직접 술을 담그고, 두부를 만들고, 절구에다 방아를 찧어서 떡을 만들었습니다. 텃밭에서 키운 채소를 뜯어와서 나물을 무치고, 닭을 잡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어마어마한 양의 생선을 구워냈습니다. 

그렇게 차려낸 제사상은 언제나 하나로는 부족했습니다. 나란히 붙여놓은 두 개의 상으로도 미어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제사를 모시러 온 집안 어른들조차 차려놓은 상을 내려다보며 임금님 수라상도 그만 못했을 거라는 농을 던졌을 정도였습니다.  

힘이 들었던 것은 일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추석은 그럭저럭 견딜만 했지만 문제는 설이었습니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밖에서 덜덜덜 떨면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은 고된 노동보다 몇배 더한 고통이었습니다. 시도때도없이 불어대는 정월 초하루 갯바람은 거의 공포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잘 지어진 집이라면 추위 정도야 문제도 아니겠지만 시댁 건물은 거의 허물어져가는 흙집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집에 비해서 제사상은 걸맞지 않게 화려찬란했습니다. 제사상을 좀 줄이면 새집 하나는 느끈하게 짓고도 남겠다는 마음이 상을 차릴때마다 열두 번도 더 들곤 했지요.

그렇게 명절을 보내다 보면 먹은 음식이 제대로 소화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명절 때 필수 준비물 중에 하나가 위장약 두통약 그런 것들이 꼭 들어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돌아오면 온 몸에 파스를 덕지덕지 바른채 며칠동안 끙끙 앓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명절 때 일을 했던 부엌과 수돗가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드디어~ 명절로 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지난 설 때였습니다. 시어머니는 집안 어른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뜻밖의 선언을 했습니다. "내가 어지간하면 모시고 싶은데 더 이상은 안되겠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띠웅~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성화에 가까운 주위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제사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움켜지고 있었던 분이 바로 시어머니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만큼 제사에 대한 집착이 컸으니까요. 말하자면 제사는 곧 시어머니의 삶이었습니다. 그런 제사를 맏며느리에게 넘기겠다고 했습니다.

시어머니의 전격적인 발표를 들으면서 짐을 벗어버린 것처럼 홀가분할 줄 알았습니다, 기분이 날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왠지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뭔지 모를 뭉클함이 가슴 한구석을 쓸고 지나갔습니다.

결연하게 그 말을 던져놓고 시어머니는 돌아앉아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눈물을 찍어냈습니다. 마음이 시렸던 건 시어머니의 축처진 안스러운 어깨가 두 눈에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보냈던 명절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습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는 내 의지와는 무관한 고통과 힘듦만이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내가 스스로 열심히 살아낸 삶도 함께 들어있었습니다.

이제 명절 증후군이라는 단어는 나하고는 무관해졌습니다. 도로 위에서 몇시간씩 발이 묶이는 불편함도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비상약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돌아와서 며칠을 끙끙거리지 않아도 됩니다. 명절날 영화도 보고 늦잠도 잘 수 있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그래서 더 좋음도 더 나쁨도 없습니다. 지금의 힘듦이 다만 힘듦으로 남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도 소중한 무엇을 만들어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생각케 하는 추석 아침입니다. 아마도 십년 세월이 흐른 후 쯤에는 말하자면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난 후의 명절은 지금과는 또 너무나 달라져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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