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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차의 향기는 사라져가고~

by 달그리메 2015. 10. 15.

따뜻한 차 한 잔을 옆에 두고 컴퓨터를 켠다. 향기는 꽃잎 한 장 만 큼의 두께로 코 끝에 와 닿는다. 옅은 듯 무심해서 얼핏 스치면 그냥 모를 수도 있을 만큼의 향이 기분좋게 퍼진다. 그래서 좋다. 너무 깊으면 부담스럽고 너무 얕으면 서운하다. 사람의 마음도 차 향을 닮았다. 너무 깊으면 상처를 받고 너무 얕으면 아쉬워한다.

 

한 모금을 들이켜 입 안 가득 머금어본다. 따끈함이 온 몸을 기분좋게 이완시켜준다. 그렇다고 오감을 자극하는 특별한 무엇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단백한 것이 다소 밍밍한 그런 맛이다. 마지막까지 삼키고 나니 기분좋은 여운이 남는다. 긴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곁에서 머무를 수 있었던 까닭이 이것 때문이었을까...

 

 

 

차의 묘미는 그 맛이 한결 같지 않은 데 있다. 들인 공에 따라서, 거둔 시기에 따라서, 만든 방법에 따라 품고 있는 풍미가 달라진다. 심고 거두고 다듬는 어떤 이의 마음과 정성과 손길의 정도에 따라 급이 달라진다. 환경과 본성에 따라 제각각 생김새가 다르고 인품이나 가치관이 달라지는 인간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상상을 해보시라~ 한 가지 맛을 내고 한 가지 향 만을 가지고 있는 차, 그리고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는 인간들만 있다면 아~이런 세상은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을까! 주어지는 조건과 다듬는 공에 따라 격이 달라지는 차와 인간의 동질성은 오랜 시간 서로의 곁에서 편안하게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는지.

 

화려한 영화를 뒤로 하고 차는 이제 한낱 기호식품으로 밀려난 신세가 되었다. 사람들은 닿을듯 말듯 감질나게 만드는 차의 향기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들의 혀를 행복하게 해 줄 좋은 자극들이 널리고 널린 세상이 된 것이다. 작고 여린 찻 잎이 품고 있는 역사는 그것이 내어주는 향 만큼이나 깊고 다양했다는 사실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차는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들에게는 정신을 맑게 해주는 귀물이 되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상인들에게 돈 줄이 되어주었고, 정치적인 공물이 되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예를 차릴 때는 서로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었고,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시켜주는 몫까지도 담당했다. 어디 이뿐이랴 가난한 민초들에게는 찻 잎을 가꾸고 거두는 노동이 목숨줄이 되어주거나 착취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리라.

 

때와 장소를 달리하며 변신을 했지만 차의 근본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과 맞닿아 있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없고서야 어찌 그리 큰 힘을 가질 수 있으리. 더 이상 차가 아니어도 위안받을 것들이 많아진 세상에서 차는 무죄다. 차 맛이 변한 게 아니라 세상이 변했고 사람들의 입맛이 변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 앞에서 인간이 느끼게 되는 것은 무상함이다.

 

 

2년 만에 다시 찾은 하동 매암다원은 그 때에 비해 생기를 잃은 듯하다. 2년 전 찾은 때가 봄이라 초록의 선명함이 기억에 새겨진 탓일까? 가을과 쇠락이 서로 엉켜 있는 듯 한 매암다원에는 그러거나 말거나 화사하게 물이 오른 하얀 차 꽃잎이 저 홀로 피고 지고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나무로 만든 자리 곳곳에 피어있는 이끼는 질정없이 불어대는 가을바람처럼 마음을 스산하게 만든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차나무의 행렬은 그저 잘 가꾸어진 정원수처럼 무념하게 서 있다.

 

커피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있는 차의 영화를 다시 누릴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강동오 관장의 답은 짧고 단호했. "없습니다. 다만 명맥을 유지할뿐입니다" 어슴프레하지만 희망적인 답을 할 수도 있으련만~ 제품을 다양하게 만들거나 현대인의 기호에 맞게~ 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의 단정적인 대답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들에 대한 미련처럼 쓸쓸하게 들린다.

 

그러나 어쩌랴 물질과 상관없은 순수한 사랑, 그 본연의 모습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물질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인간의 이기를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단정적인 답변 이면에는 냉혹한 현실이 깔려있다. 차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변해버린 사람의 입맛이 아니라 거대 자본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의 입맛을 바꿔놓은 것은 커피가 아니라 거대 자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붐비는 구석구석마다 스타벅스니 엔젤리너스니 하는 국제적인 이름을  단 커피집이 들어서 있다. 광장처럼 넓은 공간을 마련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그 곳에서 파는 커피 한 잔 가격은 대략 3~5천원 정도이다. 순수하게 커피 값만 놓고 보면 무지 비싸다. 원가를 두고 500원 1,000원 운운하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커피만 마시러 그 곳을 찾지 않는다. 동네 아줌마들에게는 사랑방이 되었고, 학생들에게는 독서실이 되었다. 전망좋은 곳에 앉아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2~3시간 동안 호사를 부릴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커피값 이상을 누린다. 그런 구조를 누가 만들었느냐 거대 자본들이다. 강동오 관장의 말이다.

 

식어 있는 차를 입 안 가득 마시고 천천히 목으로 넘겨본다. 따뜻했을 때 만큼의 향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미지근해지면서 더해진 감칠 맛이 한 결 깊게 느껴진다. 뜨거울 때 맛과 미지근해졌을 때 맛이 다르고 물을 한 번 부었을 때와 거듭 부었을 때 맛이 다르다. 또한 거둔 시기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담는 그릇에 따라 느낌이나 풍미가 달라지는 것도 매력이다. 마주앉아 시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은 말해 무엇하라!!

 

이제 그런 맛과 멋이 사라지고 있다. 차의 향기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그것을 찾는 사람이 사라져 간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해도 변하지 않은 진실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오랜 세월 동행하면서 인간의 삶을 위로했던 차가 혼돈의 세상 속에서도 무던히 견뎌 언젠가는 화려하게 부활하게 될 그 날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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