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가장 강하지만 또한 가장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한 평생 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고작 팔 구십년이다. 그것도 의학이 발달 된 요즘 세상에서야 가능한 일이 되었지만 겨우 오륙십 년을 살다 간 세월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불로장수를 꿈꾸웠던 진시황이 오십을 넘기지 못했다거나, 요즘같은 세상에도 아쉬울 것 없는 재벌 회장님이 채 팔십도 되기 전에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면 한 편으로는 참 공평한 세상이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만약 나무처럼 인간이 수백 년을 살 수 있다면 세상은 어땠을까?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지금보다 더 아둥바둥거리며 살까? 아니면 조금은 욕심을 내려놓고 살아갈까? 인간이 욕심을 내려놓은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 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문화콘텐츠진흥원은 우리의 삶 속에 녹아있는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그 속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 진행을 하는 이야기 탐방대는 모두 일 곱 차례로 이어지는데 첫 번째 주제는 나무다.  

 

 

지금은 한 낱 미신쯤으로 여기지만 옛날에는 마을마다 비보 대상이 있었다. 비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을 괴롭히는 여러가지 액을 막아주는 액막이 정도로 이해를 하면 좋을 듯 하다. 비보물은 자연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고 자연의 위협이 강한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일수록 그것에 대한 믿음은 강할 수밖에 없다.

 

비보 대상은 다양했다. 나무로 장승을 만들어 세우거나, 바람이 거친 바닷가 근처에는 갯바람에 쉬 상하는 나무 대신 벅수라고 부르는 석상을 세우기도 했다. 마을 들머리에 서 있는 나무도 비보 대상이 되었다. 이제는 흔적이 없지만 길을 가다 들판 가운데 커다란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아마도 옛날에는 사람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나무를 심거나, 장승이나 벅수를 세워 액막이로 삼고 싶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그 속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살고 있는 환경에 따라 비보 대상을 향해 빌었던 절실함의 차이는 조금씩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비교적 자연의 재해를 덜 받았던 농촌이나 산촌보다는 거친 바다와 싸우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갯가나 사람들의 무탈에 대한 간절함은 육지 사람들 비해 몇 배는 절실하지 않았을까! 

 

겉으로 보면 나무나 돌이나 다 자연물이지만 그 속에도 고만고만한 사연들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은 돌로 만든 벅수가 서 있지만 원래는 갯가 근처에도 나무로 만든 장승이 세워졌다고 한다. 일년 365일 갯바람을 견디어야 했던 나무의 수명이 그리 오래 갈 리가 없다. 상한 장승을 2~3년 마다 새로 장만을 해야 했는데 그 작업이 수월하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새로 장승을 만들어 세우는데 무엇이 가장 문제가 되었을까? 물론 사람이다. 인간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한 부분이지만 정작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드물다. 스스로를 강자라고 자처하지만 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한 존재이면서 또한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한 존재이기도 한가!

 

인간을 보호해 줄 신성한 비보물을 만드는 주체인 사람은 정갈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된다. 흠결이 많은 인간이 만든 비보물 앞에서 사람들이 평온을 기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란 게 어떤가! 타고난 원죄가 많은 존재가 아니던가~깨끗하고 정갈한 사람을 찾는 게 그리 녹녹치 않자 자주 바꾸어야 하는 나무로 만든 장승 대신에 그 자리에 돌로 만든 벅수를 세우게 되었다. 혹시 길을 기다가 벅수를 발견하게 되면 먼 옛날 어느 시절쯤에는 이곳이 바다 근처였었구나 그렇게 생각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듯 하다.

 

그렇다고 그 법칙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 창녕 관룡사 들머리에 할머니 할아버지 석상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는데 아무리 상상을 하고 짐작을 해도 이곳이 바다 근처 일 까닭은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비보상을 만드는 재료는 근처에서 구하기 쉽거나 지역 특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비보 대상은 비단 무생물에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살아있는 대상도 비보물이 되었는데 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을 비보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장승이나 벅수보다 그 것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몇 배의 공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오래된 나무에는 영혼이 살아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은 비보수로 정해놓은 나무가 죽기라도 한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액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이어져 늘 사람들의 마음을 옥죄었을 것이다. 한 두 그루 나무가 아니라 비보림으로 숲을 조정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공이 들어가기도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한 두 그루보다는 느슨한 구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찾아간 곳은 사천시 대곡면 마을 숲이다. 마을 어귀나 성황당 앞에 서 있는 노거수 한 두 그루가 아니라 소나무로 이루어진 숲이다. 이 곳에다 처음 소나무를 심었던 마을 사람들의 심정은 그 어떤 절박함보다는 단순하지 않았을까 그런 짐작을 해본다. 산에 둘러싸여 평평한 곳에 안정적으로 위치한 마을 지형도 그러하지만 한 그루에다 집중하는 간절함에 비해서는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외부로부터 바람을 막아주고 마을을 감싸안아주는 병풍과도 같은 역할을 기대했던 나무들이 자라면서 뿜어내는 신비로운 기운에 사람들은 점점 더 마음을 기대었을 법하다. 만약 처음에 비보수로 심었다 하더라도 그 품새가 보잘 것 없고 왜소하다면 비보수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의 상을 인간이 우러러 볼 수 있도록 단을 높이 세우고 크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기댈 대상은 반드시 인간의 마음을 압도 할 수 있는 그 무엇의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소나무의 특성은 재미있다. 다른 나무들과 섞여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모양새는 가늘고 길쭉하다. 반면 소나무들만 모여서 자라는 곳에서는 줄기가 두텁고 굽어있다. 이런 모양새의 특징도 알고 보면 생존과 연관이 있다. 더 많은 빛을 받기 위해 위로 향하거나 더 많은 영양을 얻기 위해 옆으로 진을 치는 것이다.

 

소나무의 특성을 조금만 들여다 본다면 비보수로 소나무를 정한다는 것이 조금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잘 자란 소나무는 그 자태가 늠름하고 기품이 있기도 하지만 느티나무나 은행나무처럼 수명이 길지 않을 뿐더러 재선충과 같은 병이 들기라도 한다면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운 나무이기도 하다. 그런 나무를 마을의 비보수로 섬긴다는 것이 보통 공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기에 애초부터 작정을 하고 비보수로 심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찾아간 대곡 마을 숲은 한창 단장 중이었다. 소나무들이 다들 영양제 병을 하나씩 매달고 있다. 소나무는 잎이 뻗은 만큼 잔뿌리를 넓히는 법인데 무슨 까닭인지 소나무 줄기 근처에다 골을 파서 헤쳐 놨다. 줄기에는 영양제 병을 매달고 있지만 그 영양이 뿌리로 공급되지 못하게 골을 파놨으니 무슨 영문인지 알 길이 없다.

 

마을 숲이 소문이 나면서 어떻게든 빛나게 만들고 싶어하는 비보수와는 다른 인간의 욕심들이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다정도 병이라 했고, 귀한 자식일수록 천하게 키우라는 말도 있는데 이 마을의 비보수는 이제 마을 사람들과의 안녕과 상관없이 관광 상품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것도 다 시절의 흐름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의 안녕을 빌어주었던 소나무는 어찌 되었던 이제 시절에 걸맞게 제 구실을 하게 된 것 같다.

 

비보수가 지금은 마을을 알리는 상품이 되었듯이 백년 후 쯤에는 어떤 것으로 이 마을 사람들에게 덕을 나누어줄지 궁금하다. 그 옛날 이 나무를 처음 심었던 사람들이 짐작 할 수 없었던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세월이 흐른 후 소나무의 뜻과는 상관없는 변신을 지금은 아무도 알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저저나 백년 후의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두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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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달그리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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